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문단 편집) === 최후 === 기원전 208년 다섯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마르켈루스는 베누시아에 겨울 숙영을 하고 있던 로마군과 합류했다. 얼마 후, 동료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한니발의 배후지인 브루티움으로 진군해 로크리 시를 포위했다가 한니발이 접근해오자 포위망을 풀고 베누시아로 가서 마르켈루스와 합류했다. 마르켈루스와 크리스피누스는 베누시아와 반티아 사이에서 한니발과 대치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상대를 만만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섣불리 회전을 벌이지 않고 단지 소규모 전투만 벌었다. 당시 양측 진영 사이에는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었다.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 300명을 그 곳으로 보냈다. 그리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고, 그저 그곳으로 향할 정찰대에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는 직접 그 숲을 정찰하기로 마음먹고, 250명의 분견대와 동료 집정관 크리스피누스, 그리고 아들 마르켈루스와 함께 언덕으로 향했다. 이에 누미디아 기병들이 그들을 덮쳤고, 마르켈루스는 이들과 맞서다 [[트리부누스 밀리툼]] 1명, 동맹군 장군 1명, 40명의 로마 기병과 함께 전사했다. 크리스피누스와 아들 마르켈루스는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니발은 그동안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마르켈루스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직접 현장으로 가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르켈루스의 유해를 멍하니 바라봤다고 한다. 한편, 가까스로 탈출한 동료 집정관 크리스피누스는 진영에 도착한 뒤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의 인장을 얻었다는 사실을 모든 인근 마을에 알렸다. 그 결과,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의 명령을 사칭하여 여러 마을에 보낸 서신을 어떤 마을도 믿지 않았고, 한니발은 마르켈루스를 죽인 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후 자신을 찾아온 사절단에게 부상이 심각하여 로마로 가서 독재관을 지명할 수 없다고 밝히고, 그 자리에서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독재관으로 추천했다. 그 후 카푸아에서 몇달간 신음하다가 기원전 208년 후반기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로마 역사상 최초로 두 집정관이 같은 해에 전사했다. 로마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던 [[칸나이 전투]] 때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지만,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살아남았는데, 이 소규모 접전으로 두 집정관이 나란히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